충무공 이순신 당포대첩기념사업회 창립총회
○ 당포대첩은 임란 초기 충무공 이순신의 해전 중 2차 출동(사천.당포.당항포)으로 한산대첩이 있기 한 달 전(1592. 6. 2.)의 해전으로 3차 출동 한산대첩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중요한 해전임.
○ 그럼에도 한산대첩에 묻혀 조명받지 못한 해전으로 전락했고 격전지 당포는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는 불모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통영군 공무원의 실수로 항구의 명칭마저 삼덕항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함. 지금이라도 빼앗긴 이름 당포를 찾고 당포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찾기 위해 당포대첩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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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당포대첩기념사회 결성에 즈음하여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0일 만에 임금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하였고 조선 8도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전란에 휩싸였습니다. 마침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우리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1차 옥포해전, 2차 당포해전, 3차 한산대첩, 4차 부산포해전을 통해 임란 초기 서해로 지출하려던 왜적의 야욕을 일시에 좌절시키고 말았습니다.
저 청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이 있기 약 한 달 전 1592. 6. 2. 당포성을 점거 노략질을 일삼던 왜적을 격퇴한 전쟁이 바로 당포해전이었습니다. 1592. 7. 7. 당포항에 정박 중이던 이순신 함대에 견내량에 적선 73척이 정박해 있다는 목동 김천손의 고급정보가 보고됩니다. 밤샘 작전회의를 거쳐 다음날 아침 당포항을 출발한 조선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선봉장으로 학익진을 펼쳐 왜선 59척 왜적 9천 명을 수장시키니 이것이 바로 그 청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입니다.
이뿐이겠습니까? 1604년 6월 14일 캄보디아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왜의 무장 무역선이 풍랑을 만나 당포 앞바다로 표류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6대 이경준 통제사의 명을 받은 신여량 장군과 휘하 장수들이6월 14일 한낮에 출동하여 다음날 15일 오후에 이르러 하루 한나절 만에 왜선을 격침시켰습니다.
통제영은 6월 15일 생포한 중국인 16명, 일본인 32명(여자 1명 포함, 1명은 호송 도중 사망, 총 31명), 남만인(포루투갈) 2명의 신병을 확보하여 서울로 압송하였습니다. 이름하여 제2의 당포대첩이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군사요충지 당포가 역사의 현장에서 차츰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당포대첩의 역사적 의의는 한산대첩에 눌려 그 빛을 잃었습니다. 현재는 항구의 명칭마저 일본이 당포를 지우고 붙인 삼덕항이라 부르고 있으니 지하에 계신 충무공 이순신이 노할 일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이름난 당포성 복원은 무려 20년이 지났지만 그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산양읍민들이 나서서 잃어버린 당포를 찾고 충무공 이순신의 당포대첩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금번 산양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로 ‘충무공 이순신 당포대첩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자 하오니 깊은 관심으로 이 역사적인 일에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12월 일
충무공 이순신 당포대첩기념사업회 창립준비위원장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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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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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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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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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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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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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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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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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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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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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양읍지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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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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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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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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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식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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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명
|
010-8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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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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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한산대첩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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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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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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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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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영충렬사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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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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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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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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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영시의회의원
|
서국현
|
010-9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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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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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양읍장
|
정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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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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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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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양과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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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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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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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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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의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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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진
|
010-3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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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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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의회의원
|
조필규
|
010-7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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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산양읍장
|
황재열
|
010-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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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남해안별신굿
보존회회장
|
정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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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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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통영한산대첩축제
감독
|
정용원
|
010-6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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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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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한산대첩문화재단본부장
|
정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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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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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동방한의원원장
|
서룡
|
010-9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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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동백관광대표
|
정희민
|
010-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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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전통영해경서장
|
김평한
|
010-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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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전통영시해양관광국장
|
임채민
|
010-4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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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통영쪽빛감성학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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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철
|
010-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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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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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남제분 이사
|
김대성
|
010-3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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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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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읍주민자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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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양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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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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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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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읍이장단장
|
유성조
|
010-3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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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산양읍새마을회장
|
탁만윤
|
010-3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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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산양자봉회장
|
김윤실
|
010-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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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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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성산업개발대표
|
이기욱
|
010-4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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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서양화가
|
박동열
|
010-4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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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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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양우체국장
|
손수열
|
010-4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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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산양읍주민자치위원
|
김정남
|
010-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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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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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양조장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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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란
|
010-8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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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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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농협이사
|
송정순
|
010-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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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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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이장
|
전영민
|
010-6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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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죽전이장
|
김건태
|
010-7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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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중화이장
|
김상률
|
010-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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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일운이장
|
신상종
|
010-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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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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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전이장
|
정문갑
|
010-6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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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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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이장
|
이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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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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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해란이장
|
최은호
|
010-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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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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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이장
|
정종래
|
010-4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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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산양어촌계협의회장
|
정일생
|
010-4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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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서양화가
|
설희숙
|
010-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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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신봉이장
|
임채현
|
010-9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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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동부이장
|
김정수
|
010-8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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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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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읍 금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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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아
|
010-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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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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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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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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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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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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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금평)
|
서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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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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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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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세무회계사무소
대표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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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언
|
010-5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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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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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우조선 근무
|
김병곤
|
010-9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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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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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금고이사장
|
김종환
|
010-8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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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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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읍주민자치회
사무국장
|
천호영
|
0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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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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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이장
|
김종호
|
010-6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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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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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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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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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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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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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장
|
신성안
|
010-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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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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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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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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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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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당포대첩기념사업회 회원명단
<관련 자료>
〔당포파왜병장 - 당포대첩〕
6월 2일진시(辰時 07:00∼09:00)에 ‘왜적선이 당포 선창(唐浦船滄)에 머물며 대어 있다.’ 는 말을 듣고 사시(巳時 : 09:00∼11:00)쯤 곧장 그곳에 이르니 왜적들이 무려 300여 명인데 반쯤은 성으로 들어가서 재물을 다 없애고 또 많은 왜적들이 성 밖에는 험한 곳에 의거하여 함께 철환을 쏘고 있었습니다.
왜적선은 크기가 판옥선만 한 것이 9척과 중·소선을 합한 것 12척이 선창에 흩어져 대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큰 배 위로 높은 층루(層樓)가 우뚝 솟아 높이가 3·4길[丈 : 10자]이나 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휘장의 사면에는『黃(황)』자를 크게 썼으며 그 안에 왜장이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層樓船) 아래로 들이받을 듯이 가면서 용아가리로 현자 철환을 치쏘고 또 천자총통에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지자총통에 장군전(將軍箭)을 쏘아 그 배를 깨뜨리자 뒤따르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마구 쏘았습니다.
중위장 권준(權俊)이 돌진하여 들어가 왜장이라는 놈을 화살로 쏘아 맞추자 쿵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므로 사도 첨사 김완(金浣)과 군관 흥양 보인(保人) 진무성(陳武晟)이 그 머리를 베었습니다.
왜적의 무리들이 겁내어 달아나면서도 철환과 화살에 맞은 놈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넘어지는데 머리 6급을 베고 그 배들을 모조리 (21척) 불태워버린 뒤에 여러 전선의 용감한 군사들이 그대로 상륙하여 끝까지 쫓아서 수색하여 적의 목을 베려하던 때에『또 왜대선 20여 척이 소선을 많이 거느리고 거제도에서 와서 대어 있다.』는 탐망선(探望船)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당포는 지형이 좁아서 교전하기에 합당치 않아서 바다 밖에서 요격하려고 노를 바삐 저어 바다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왜적선들이 5리쯤 되는 거리에서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는 달아나 숨을 겨를도 없이 우리 여러 전선이 외해까지 뒤쫓아 갔습니다. 이미 날은 땅거미지고 어두워져서 싸울 수 없어 진주땅 창신도(昌信島)에서 머물면서 배를 대고 밤을 지냈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 - 한산대첩〕
7월 7일에는 동풍이 크게 불어 배를 띄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성 땅 당포(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나무를 하고 물을 긷고 있을 때, 난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
있던 그 섬(미륵도)의 목자(목자 : 왕실의 말을 기르는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 김
천손(金千孫)이 신 등의 배를 멀리서 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하기를 “크고 작은
왜적의 배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경(미시)에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나와 거제 고
성 땅 견내량(見乃梁)으로 들어가 정박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여
러 장수들에게 적들을 칠 전략을 엄히 지시하였습니다.
7월 8일에는 이른 아침에 왜적의 배들이 있는 곳을 향해 가다가 바다 중간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적의 큰 배 1척과 중간 배 1척이 선봉에 서서 탐색하면서 나오다가 우리 수군을 보고는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쫓아가 보니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2척이 진을 치고 정박해 있었는데, 견내량의 지형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서로 부딪쳐서 싸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왜적들은 만약 형세가 궁해지면 바다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가겠기에,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완전히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고, 혹시 뭍으로 올라가더라도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 전과는 생략
〔제2의 당포해전과 당포전양승첩지도- 산양읍지 P503〕
1592년 6월 2일 당포승첩이 있었던 날로부터 12년 후인 1604년 6월 14일 당포에서 또 한 번의 해전이 있었다. 2004년 10월 5일 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와 최정간 미술사 연구가의 통영 탄생 4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발표 자료(통영 탄생 400주년 기념 사료집, 통영시 발간)를 인용 제2의 당포해전과 <당포전양승첩지도>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1592년 6월의 당포대첩(당포해전)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제2의 당포해전이라는 용어를 썼음을 밝혀둔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이 되었지만 한·일 두 나라 사이에는 아직도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이경준 통제사는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을 경상도 거제현 두룡포로 옮겼으며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해 부산을 전초前哨로 남해 전 수역에 경계 태세를 펴고 있었다. 같은 해 6월 14일 낮, 삼도수군통제영의 직할 수역 서남쪽을 맡고 있던 미조항진(지금의 남해군 미조면) 수군첨절제사 이섬李暹의 긴급 보고가통제영으로 날아들었다.
사시에 쌍돛대를 단 국적 불명의 ‘흑색 대선’이 추도楸島에서 당포 해안 쪽으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당포라면 통제영 앞쪽 육로로 20리, 수로로 30리 거리, 그러니까통제영 바로 눈앞에 적선이 침입한 것이다. 적선 발견 과정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적선 침입 경로에 위치한 당포 만호가 발견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남해섬 동남 끝에 자리 잡은 미조항진 첨사가 발견했느냐는 점이다. 이섬이 적선이 추도에서 당포로 가는 것을 처음 발견했으므로 적선은 정남에서 당포쪽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고 미조항 수역을거쳐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항진한 것이다.
우리 연안에 침입한 괴선박 황당선荒唐船(정체불명의 배)을 조기 발견한 미조항진의 외양 초계활동은 매우 철저했다. 한편 긴급 보고가 신속히 전달된 것은 이섬이 일선 부대의 보고를 받고 미조항 본진에서 통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근 수역을 초계 중 처음으로 적선의 침입을 발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섬의 긴급 통보를 받은 이경준 통제사는 즉각 우후 신여량에게 지휘를 맡기고 주 전함인 판옥선 2척을 급히 출동시켜 적선을 요격하도록 명령하였다.
7년 왜란을 역전한 빛나는 전적을 가진 이경준은 1603년(선조 36) 2월 1일 제6대 통제사로 부임, 이때 원대한 전략적 견지에서 통제영을 두룡포로 이전, 세병관을 비롯한 방대한기지 건설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경준은 당시 조선군에서 으뜸가는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그의 오랜 군 경력은 주로 육전일 뿐 해전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삼도수군통제사 임무를 사양한 일도 있었다. 한편 신여량은 전라도 흥양(지금의 고흥군)사람으로 임진 전쟁 때 권율의 행주산성 싸움에 참전해 공을 세웠고 그 뒤 이순신 휘하에서 수군으로 활약했었다. 그는 전임 통제사인 제5대 통제사 유형 때부터 우후로 재직한 수군의 베테랑이다. 따라서 통제사 이경준, 우후 신여량 콤비는 당시 조선 수군에서 최강의 팀이라할 수 있다.
당시 한·일 간에 외교 채널을 통해 강화 사절이 오가고 있었으나 군은 전시 상태로 생각하고 조선 수역으로 들어오는 무허가 일본 선박은 적선으로 간주, 왕왕 위력초계를 펴왔다. 당시 일본은 동남아시아 통상을 활발히 했으므로 많은 상선이 아시아 수역을 항해했다. 그리고 이들 상선은 거의가 실직한 무사를 용병으로 태운 무장 상선이었으며 약탈행위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1600년(선조 33) 6월 13일 제4대 통제사 이시언 휘하의 조선 수군은 제주도 방의현(남제주군 표선면) 앞바다에서 사략선私掠船을 발견하고 추격 끝에 나포, 일본인 20명을 죽이고납치된 중국인 6명을 보호한 일이 있었다.
통제영 앞바다까지 침투(사실은 표류)한 일본선은 수백 명이 탑승한 대형 중무장선이었다. 6월 14일 한낮에 출동한 조선 수군과 밤낮으로 맞서 싸웠으나 다음 날 15일 오후에 이르러 하루 한나절 만에 조선 수군의 치열한 화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투항했고 배는 침몰하였다. 통제영은 6월 15일 생포한 중국인 16명, 일본인 32명(여자 1명 포함, 1명은 호송 도중 사망, 총 31명), 남만인 2명의 신병을 확보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 배는 4월 17일 캄보디아 왕국의 프놈펜 항구를 출발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던 중이었다. 오랜 항해 끝에 일본 땅에 거의 다 와서 이틀 동안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 6월 14일 새벽, 날이 개이면서 드디어 육지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이 땅이 일본 구주 서쪽에 있는 오도五島인줄 잘못 알고 안내선을 부르기 위해 호포號砲를 쏘아댔다.그러나 바라던 일본 안내선은 나타나지 않고 뜻밖에 거대한 판옥선 2척을 선두로 조선함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들이 오도로 착각한 곳은 바로 통제영이 있는 조선 남해안 땅(미륵도)이었다. 날이 갠 후 일본인들은 판옥선 2척이 전방에 보이자 조선 군선인 것을 알고 돛을 올려 남쪽으로 도주하려고 했으나 바람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6월 14일은 그들에게 최악의 날이었다. 조선함대의 포위망 속에서 일본선이 하룻밤, 하루 낮을 버틴 것을 보면 상당히 완강하게 저항한 것 같다. 일본선이 조선 땅에 표류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진로를 이탈했을 뿐, 항해 능력은 건재했고 대형 무장선이기 대문에 충분한 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선은 고도의 전투력을 보유한 중무장선이었다. 2일간의 당포해전은 상당한 격전이었다.
신여량의 후손인 고흥의 고령신씨 문중이 400년간 보관해 온, 선조가 신여량에게 내린상가교서賞加敎書(국왕의 표창장)에는 치열했던 전황이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선조는 비변사 당국의 왜선 생존자 심문이 일단락된 다음 그해 7월 17일자 교서에서 “왜선이 풍랑을 만나 우리나라에 표류했다지만 기실은 해적선이 침략해 온 것이다.”라고 왜선을 표류선이 아닌 적선으로 규정한 것이다.
“병력은 아군이 많았지만 왜선은 송진, 석회로 도장한 거대한 함선에 무장이 막강하다. 적은 적고 아군은 많다지만 배는 그쪽이 크고 우리 것이 작으니 어떻게 당해낼것인가. 이틀 동안 대처하니 사기 또한 저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해 일본선의 선체가 우리 수군의 주함인 판옥선보다 더 거대해 상당한 고전이었음을 피력하였다. 또 “적선은 돛을 올려 썰물을 이용, 탈출하려고 했으나 신여량은 긴 밧줄로 적선을 포착, 선두에 서서 적선에 돌격해 많은 적을 죽여 임진왜란 후 10년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라고 극찬하였다. 선조의 교서는 미사여구의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라 정확하고 진솔한 전황묘사가 들어 있어 사료성이 매우 높은 문건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포성과 함성이 메아리치는 6월의 당포 앞바다에서 신여량의 진두지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형상화 한 것이 뒷날 선조가 유공 지휘관에게 하사한 어사도御賜圖인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이다. 또 이때 신여량이 사용한 긴 밧줄이란 이순신이 애용한 사조구四爪鉤이다. 사조구는 쇠사슬이 달린 닻 모양의, 4개의 쇠갈고리로 된 적선 견인용 기구로서 거리가 멀 때에는 밧줄을 이어 쓰기도 한다.
《이충무공전서》에 의하면 그 제원은 갈쿠리 길이 아홉 자, 자루길이 한 자 다섯 치, 자루 둘레 다섯 치, 사슬길이 스물여덟 자다. 선조는 이 작전의 최대의 공로자인 신여량을 절충장군(정3품)에서 가선대부(종2품)로 특진시켰다. 한편 통제영이 일본선의 생존자를 조사한 결과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다.
선주인 나가사키 거주의 중국인 황정과 그의 보좌역인 일본인 구우문久右門의 진술을 통해 이 배는 단순한 일본의 동남아시아 무역선인 주인선이 아니라 일본의 통치자인 이른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일본과 캄보디아 간의 공식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파견된 무역사절선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명(중국)정부는 자국민을 구출, 송환한 답례로 조선 수군 지휘 계통의 유공자인 이경준 통제사, 우후 신여량, 첨사 이섬 등에게 각각 은 스무 냥, 저사(모시옷) 두 벌을 포상하고 다시 은 열 냥 저사 한 벌을 가상加賞했다. 1987년 10월 10일자 《한국일보》 1면 톱기사에 “‘첫 도래 서양인은 포르투칼 상인 멘데스’ 등록유초謄錄類抄에 새 사실, 박연보다 23년 앞서-”라는 제목으로 특종보도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래 서양인은 지금까지 알려진 박연(네덜란드인 1627년 제주도에 표착)이 아니고 1604년 6월 15일 경남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당포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에 의하여 포로로 붙잡힌 포루투칼 상인 주앙멘데스임이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명지대 박태근 교수가 서울대 중앙도서관 규장각에서 발견한 조선시대 비변사의 공식문서인 등록유초 기록에서 드러난 것이다. 등록유초에 따르면 캄보디아를 다녀오던 일본의 덕천가강의 무역사절선이 1604년 6월 14일 당포해안에 표류해 왔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 장군은 본영 및 당포진의 수군병력을 지휘, 이 왜선과 1주야에 걸친 치열한 접전 끝에 최소한 200여 명 이상의 무장 선원을 죽이고 배를 나포 격침시킨 후 이 배에 타고 있던 사절단장 황정과 왜인 31명, 중국인 16명, 포루투칼 상인 주앙멘데스와 그의 흑인 추종자 등 모두 49명을 포로로 붙잡아 서울로 압송했다. 염소수염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된 주앙멘데스는 4개월여를 국내에 머물면서 관헌에 의해 심문받았다. 그 후 그는 조선 정부가 포로들의 귀환 문제를 중국 정부에 일괄 의뢰함에 따라 북경으로 보내졌다고 이 기록은 전하고 있는데 그는 한국인이 최초로 접한 서양인으로 그의 도래는 박연보다 23년, 하멜보다 49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 보도자료와 박태근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통영시에서 2006년 11월 산양읍 삼덕리 원항마을 입구에 ‘최초의 서양인 도래지’ 표석을 건립했다.
[당포대첩지] - 산양읍지 443
1592년 7월 8일, 청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은 약 한 달 전 벌어졌던 당포대첩이 교두보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592(임진년) 6월 2일, 맑다. 아침에 떠나 바로 당포(고성현: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선착장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이 줄을 서서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가 둘러싸고는 서로 싸움을 벌였다. 적의 큰 배 1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했다. 배 위에는 누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됨 직했다.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당포대첩지 전경 을 비가 퍼붓듯 마구 쏘아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순간 모든 왜적이 놀라서 한꺼번에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남김없이 모조리 무찔렀다. 조금 뒤에 큰 왜선 20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로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고성현: 통영시 산양읍추도리)로 들어갔다.”
당포 앞바다는 이충무공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여수와 남해, 부산 등 해전의 요충지였으며 작전을 짜는 곳이기도 했다. 당포해전이 있은 지 꼭35 일 만인 7월 7일이었다. 동풍이 세차게 불어 힘든 항해 끝에 또 다시 전진기지인 당포에 도착하여 식수와 연료를 준비하고 있을 때, 당포의 목동 김천손이 우리 배를 보고 급히 달려와서 전하기를 “오늘(7월 7일) 2시경 왜선 대・중・소선 합하여 약 70여 척이 영등포와 거제를 거쳐서 지금견내량에 닿아 있다.”라고 말하였다.
김천손은 이곳 목관牧官(군마를 돌보는 직) 밑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해전이 끝난 뒤에 밝혀졌지만 적 함대의 수, 이동경로, 이동시간 등 그가 전한 내용은 아주 정확하여 조선함대가 앞서 해전의 대세大勢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 정보가 되었다.
조선함대는 이 정보를 기초로 제장들과 밤샘 작전회의를 통하여 필승의 결의를 다졌으며 다음 날 7월 8일 아침 일찍이 적이 정박하고 있는 견내량 해역으로 달려갔다. 한산도해전의 승리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당포성을 중심으로 육지부, 바다 등이 모두 당포대첩지다. 1998년 6월 산양읍 당포항신축공사 도중 임진왜란 시 왜군 방어용 목책木柵으로 추정되는 나무기둥 100여 개가 발견되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95년부터 우림종합건설에서 당포항 신설공사를 계속사업으로 시행하고 있는 가운데 1998년에도 20여억 원을 들여 물양장 60m와 방파제 88m를 신축하는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그해 6월부터 해저 터파기 기초공사에 들어가 당포항 연안의 갯벌을 파내는 공사를 해왔는데 공사 도중 직경 10~20㎝, 길이 1~2m의 참나무 기둥 100여 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우림종건 측은 연안어장에 설치했다 철거하지 않은 나무기둥으로 판단해 문화재 관리당국에 보고도 하지 않고 공사를 그대로 강행, 나무기둥이 공사장 곳곳에 흩어져 방치돼 있었다. 이에 당포마을 주민들은 “나무 기둥이 발견된 곳은 어장을 운영한 곳이 아니다. 이 지역이 당포대첩지로 유명한 지역임을 감안, 나무기둥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해안접근을 막기 위한 목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주장하였다. 당포항의 목책 설치는 《중종실록》 5년(1510) 5월 24일자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도원수 유수정이 장계하기를 우도의 거제도와 고성땅의 당포 등이 중요한 요지인데 성이 무너져 시급히 보수를 해야 하나 농사철이라 백성을 동원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응급처치로 성 밑에 녹각을 설치하고 말목을 박아 방비하며 성문에 얇은 철판을 대고 포구에 큰 나무를 박고 쇠사슬을 연결하고 칡덩굴로 나무를 묶어 돌을 채워서 적선이 걸려 못 오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아뢰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주민들은 이 나무기둥들이 목책으로 밝혀질 경우 한산도 제승당과 세병관, 충렬사 등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린 유적지가 산재한 통영 지역에서 적절한 보존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왜군 방어용 목책은 전남 완도읍 장좌리 장보고 청해진 옛터와 진해시 웅천동 제덕만 매립지 공사장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억지 주장이 아닌데도 결국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이토록 위대한 전적지가 조명받지 못한 채 길가에 달랑 표지판 하나 서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마침 한산대첩 420주년 기념 ‘제51회 한산대첩 축제’에 즈음하여 한산대첩 재현 전에 이곳 당포에서 한산대첩 출정식을 개최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계속해서 당포성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당포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당포대첩공원을 조성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최초 서양인 도래지] - 산양읍지 445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도래지가 당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포항은 임진왜란 시 전라도를 떠난 좌수영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맨 처음 정박했던 통영 지역의 항구고 지금은 이곳에서 욕지도로 내왕하는 여객선터미널이 있다.
지난 2006년 9월 14일 산양읍 당포항에서는 의미 있는 제막식이 열렸다. 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라는 인물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였다. 183㎡ 부지에 기념비와 안내표지석 각 1개씩을 건립했다. 높이 1.5m의 네모난 화강석으로 만든 기념비 정면에는 한글로 “최초의 서양도래인 주앙멘데스”라는 글자가 조각되어 있고 바로 밑 동판에는 포르투갈어와 영어로 같은 뜻이 새겨져 있다. 동판은 포르투갈 해군이 제작하고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을 통해 통영시에 전달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주앙 멘데스’의 이름 앞에 ‘최초의 서양 도래인渡來人’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기록만 놓고 보면 조선을 찾은 첫 번째 서양인은 ‘주앙 멘데스’다. 그의 존재는 지난 2004년 10월 5일 통영시청 강당에서 열린 ‘통영탄생 400주년 기념국제학술대회’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이날 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는 ‘이경준(제6대 통제사) 장군의 통영건설과 당포해전’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서양인은 400년 전 당포에 표착한 포르투갈 상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박 교수는 규장각에서 발굴한 조선왕조의 국경수비일지《등록유초謄錄類抄》의 일부를 인용, “선조 37년(1604) 6월 15일 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가 통영 당포항에 표착했다.”라고 밝혔다.
멘멘데스가 조선에 표착한 것이 1604년이니 1653년(효종 4)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나 1627년 조선에 표류한 베르테브르(박연)보다 각각 49년, 23년 앞서 조선 땅에 도착한 셈이 된다. 주앙 멘데스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여 ‘지원면제수之湲面第愁’라고 불린 34세의 포르투갈 무역상인 주앙 멘데스 일행은, 당시 캄보디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橋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통영 해안에 표류하였다. 그리고 중국인 16명, 일본인 32명, 흑인 1명 등과 함께 조선 수군에 의해 생포·압송되어 조선 관리들의 취조를 받고 중국으로 추방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원면제수’보다 11년 앞서 조선 땅을 밟은 사람으로 ‘그레고리오 세스페테스’신부가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의 3대 장군 중 한 명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종군 신부로 조선 땅을 밟은 적이 있으나 당시 공식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우리 문헌에 확인된 최초의 서양인은 ‘주앙 멘데스’를 최초의 도래인으로 부르게 된것이다. 둘 다 포르투갈 사람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다음은 비문 전문이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서양인 주앙멘데스 기념비, 1604년 6월 14일 거대한 적선 한 척이 조선 수군의 본영인 통영 앞바다에 침입했다. 이경준李慶濬 삼도수군통제사의 명령으로 전함인 판옥선板屋船이 출동, 평화적으로 투항을 요청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므로 치열한 접전 끝에 격침시켰다. 이 배는 당시 일본의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캄보디아왕국에 파견한 첫 외교 무역선으로 캄보디아의 프놈펜항에서 일본 나가사키長岐로 귀항 중 풍랑 때문에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전후 생존자는 일본인, 중국인明 등 48명과 서양인 1명이다. 서양인은 포르투칼의 지원면제수之湲面第愁, 즉 주앙 멘데스로 34세의 무역상이었다. 뜻하지 않게 조선에 오게 된 첫 번째 서양인 멘데스가 온지402 돌이 되는 올해 그의 내한來韓을 기리는 빗돌을 역사의 현장인 여기 통영 땅에 세운다. 」
─ 2006. 4. 10. 사학자 朴泰根 고증
[ 당포성지唐浦城址] - 산양읍지 p418
경상남도 기념물 제63호(1983년 7월 20일 지정) /산양읍 삼덕리 243 일원
이 성은 1374년(공민왕 23)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영 장군이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한다. 그 후 이 성을 활용, 왜구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1592) 왜적에게 당포성이 점령당했으나 6월 2일 이충무공이 다시 탈환했는데 이것이 당포승첩이다.
당포성에 대한 기록은 1934년에 간행된 《통영군지》에 “산양면에 있으니 당포진의 옛터다. 둘레가 1,445척(약 676m)이고 높이가 13척(약 4m)인데 수군만호(종4품, 무관직)를 두어 지켰던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포성은 평평한 자연 활석을 일렬로 배열하여 기단석을 삼고 한 자쯤 들여서 역시 자연 활석으로 바깥벽을 수직
으로 쌓아 올리면서 안쪽으로는 바깥
보다 작은 돌과 석심을 박은 흙을 다져 밋밋하게
쌓아 올린 내탁공법으로 축성 했다.
여말선초의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축진성의
전형으로 당포마을 야산의 봉우리와 구릉의 경사
면을 이용하여 남향으로 쌓은 포곡형이다. 남쪽 해안에 정문을 두고 산 쪽으로 동문과 서문을 두었으며 문에는 옹성을 쌓았다. 동문과 서문의 좌우에 각각 1개의 치가 있고 남벽에 4개의 치를 두어 모두 8개의 치가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석축은 최고높이 2.7m, 폭 4.5m이다. 남쪽 일부의 석축이 무너진 것을 제외하고 동・서・북쪽 망루의 터는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문의 터에는 옹성이 있었는데 그 형태도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옛날 당포진에는 수군만호를 두었고, 만호는 전선 1척에 장교 6명, 사부 18명, 화포 10명, 포수 24명, 타공 4명, 격군 126명에 군량미 44석 11두, 증미 10석, 미식 3석과 병선 1척에 장교 1명, 사부 10명, 포수 10명, 타공 1명, 격군 8명과 사후선 2척에 격군 각 9명 등 장졸 236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성을 축성하기 전 원항마을 서쪽에 약 432m 정도의 석성을 쌓아 진지로 사용했던 곳이 있는데 이를 구당포성이라 일컫는다. 이후 당포성 축조 시 이 성의 돌을 빼다 사용했다고 한다. 당포성은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이후 복원의 기틀을 놓아 현재까지도 복원 중에 있다.
<당포항 변경 관련 자료>
건 의 서
존경하는 해양수산부장관님께!
“조국의 미래는 바다에 달려 있다”는 일념으로 해양부국 건설을 위해 애쓰시는 장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 마을은 충무공 이순신께서 거북선을 앞세워 1592년 6월 2일 당포성과 당포항에서 분탕질을 하고 있던 왜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던 당포승첩의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이순신 함대는 당포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사기충천하였고 이후 한 달 후 1592년 7월 7일 미륵도 목동 김천손으로부터 견내량에 왜선 7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한 뒤 밤샘 작전 회의를 끝내고 다음 날 아침 이곳 당포항에서 조선 수군을 출정시켜 한산대첩을 이룩함으로써 한산대첩 승리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낸 승전의 고장입니다. 이 역사적인 근거에 의거 통영한산대첩축제 시 이곳 당포항에서 한산대첩 출정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이 지난 1604년(선조 37) 6월 14일 추도 부근에서 당포 해안 쪽으로 일본의 무장 함대가 침입하고 있다는 미조항진(지금의 남해군 미조면) 수군첨절제사 이섬李暹의 긴급 보고를 받은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즉각 우후 신여량에게 지휘를 맡기고 주 전함인 판옥선 2척을 급히 출동시켰습니다.
이틀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통제영은 6월 15일 일본의 무장 함대를 격침시키고 생포한 중국인 16명, 일본인 32명, 남만인 2명의 신병을 확보하여 서울로 압송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포파왜병장>, <견내량파왜병장>, <등록유초> 등 역사적인 기록물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지명이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정부가 ‘당포항’을 국가어항으로 지정하면서 항구의 명칭을 ‘삼덕항’으로 지정고시함으로써 우리는 역사적인 지명 하나를 잃고 말았습니다.
물론 국가어항 지정 당시에는 당포, 원항, 궁항 등 세 개 행정마을을 합쳐 삼덕리라고 명명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 삼덕리라는 법정마을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구획하면서 순 우리말을 없애고 한자 이름 삼덕리라고 한데서 유래합니다.
최근 국가는 물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아름다운 지명 찾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가운데 통영시 욕지도를 비롯한 섬이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당포항은 어업 전진기지일 뿐만 아니라 도서지방으로 나아가는 모항(母港)으로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당포항’과 ‘삼덕항’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혼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짓밟힌 우리 고유의 지명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합니다. 우리 시민의 자존심과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삼덕항’의 명칭을 ‘당포항’으로 변경해 줄 것을 건의하오니 적극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